우리고장의 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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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의 민담

보리전에 얽힌 민담

지금의 수영교 근처의 넓은 지역을 옛날에는 보리전이라 했습니다. 이곳은 조선시대에 좌수영 산하의 포이진이 있던 곳으로, 보리를 팔던 보리전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수영에는 "보리양식 지고 매맞으러 간다"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는데 조선시대 좌수영이 지금의 수영에 있을 때, 좌수영 산하 7진의 주민들이 범법을 저질렀을 때 범법자가 곤장을 맞으러 좌수영 관아로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범법자 대신 대(代)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어쨋든 이들은 매를 맞기 위해 열흘 내지 보름치의 보리양식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매맞는 차례를 기다렸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매를 일찍 맞고 나면 보리양식이 남기 때문에 이것을 수영사람들에게 팔고 가려고 보리전을 벌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리전'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설이 있습니다.

만경대에 관한 민담

동래영지(東來營誌)는 「망경대」를 좌수영의 남쪽 2리에 있는데 두 토산(土山)이 마주 바라보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망경대는 지금의 KBS방송총국 남쪽 아랫길에서 좀더 바다쪽으로 나간 자리에 두 토산이 마주보고 있었습니다. 바다 경관을 바라보기 좋은 언덕이어서 거울같은 바다를 바라보는 대(臺)라 하여 거울 경(鏡)자를 써서 望鏡臺(망경대)라 한 것 같습니다. 여름이면 거울같이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바닷바람을 쏘려 사람들이 모여 들었는데 그 위치는 남천 1·2동 의 경계점입니다. 민락동의 「점이대」와 남천동의 「망경대」가 나란히 바다로 내밀려진 그 사이가 넓은 사장을 이루어 광안(廣岸→廣安)해수욕장을 형성한 것입니다. 이 망경대도 점이대처럼 좌수영이 설치되어 있을 당시는 바다에서 몰려올지도 모를 적을 살피는 척후처(斥候處)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망경대는 1960년 무렵부터 시가지로 바뀌어 가다가 1970년대 초의 시가지계획으로 없어졌습니다.

겸호대에 관한 민담

《동국여지승람》은 고적(古跡)을 밝힌 자리서 겸효대를 '동래현 남쪽 5리에 있다 하고 선인인 김겸효가 논바 있어 그리 이름하였다.'고 했습니다. 《동래부지》는 고적(古跡)조에는 겸 효대를 '동래부의 남쪽 5리의 척산(尺山)위에 있는데 선인(仙人) 김겸효(金謙孝)가 논 바 있어 그리 이름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동래부읍지(東萊府邑誌)》는 '배산을 동래부 남쪽 5리에 있다 하고 황령산에서 이어졌는데 겸효대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옛 기록에 의하면 오늘날의 수영구 망미동 뒷산인 배산에 김겸효라는 선인이 산 겸효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 자리가 지금은 막연하기만 합니다. 고려 때 좌사의대부 (左司議大夫)가 되어 1366년(공민왕 15)에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와 함께 당시의 실력자 신돈(莘旽)을 탄핵했다가 살해될 뻔했으나 이색(李穡)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동래현령으로 좌천되어 이곳으로 부임한 정추(鄭樞)의 겸효대 시(詩)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겸효의 밝은 빛은 연꽃을 닮고 /
가슴으로 품은 기운 속세를 떠났구나 /
고개를 돌리니 만호읍(萬戶邑)이 바로 거긴데 /
휘적휘적 신선가(神仙家)를 오간다.
(謙孝濯濯似蓮花 / 胸呑八荒氣凌霞 / 回首肯 萬戶邑 / 翩翩來往神仙家)

또한 《동래부지》의 「 겸효대」에 실린 윤훤(尹暄)의 시에서도 볼 수 있는데 윤훤은 1605년 12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했었습니다. 그리고 1607년 동래부사로 부임했었습니다. 그리고 1607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춘원(李春元)의 「겸효대」의 시를 통해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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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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