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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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유래

남천동

남천동이란 마을이름의 유래는 대연동과 남천동의 경계지점인 황령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수영만으로 유입되는 남천천에서 비롯합니다. 남천리의 명칭에 대하여 좀더 고증을 해보면 동래부지 산천조에는 남천이 동래성으로부터 20리가량 떨어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부지의 포구에는 남천포가 보이는데 부 남쪽 20리에 위치하며 어장이 있다고 합니다. 이 어장의 일대를 남천만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남천동은 남천만과 대연동 사이의 모든 해안을 통칭하여 실제로는 대단위 광역의 지역을 가리키기도 하였습니다. 경상남도 동래부지도에 의하면 우암반도의 끝을 오해야항이라 하고 대연동의 석포에서 융기된 산지의 북안쪽을 남천이라 하여 남천이 넓은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남천동의 마을이름들
    • 중골산
      • 지금의 삼익 기존 아파트자리에는 예전에 야산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형상이 죽은 용의 형상이라 하여 '죽은골산' 혹은 '중골산'이라 불렀습니다.
    • 남칭이
      • 옛 사람들은 남천동을 남천이 흐르는 곳이라 하여 '남칭이'라 불렀습니다.
    • 범바우골
      • 옛날 남천동의 가운데 있는 들판을 '범바우들'이라 불렀는데 이는 남천동 산자락에 범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불렀답니다.
    • 가장골
      • 남천동의 뒷산 골짜기를 가장골이라 불렀습니다.

수영동

수영동은 조선시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었으며, 수영이란 이름은 수군에서 "수"자와 절도사영에서 "영"자를 따와서 오늘날 동명이 생겨났습니다. 원래 경상좌수영은 부산의 감만포에 있었으나 태종 때 울산 개운포로 이전하였고, 다시 선조25년 동래남촌(현 수영)으로 옮기었습니다. 그 후 인조 13년(1635년)에 사천(현 수영천)의 홍수로 선창의 수로가 매몰되어 병선의 출입과 정박이 불편하여 다시 감만이포로 옮겼으나, 효종3년(1652년)에 다시 동래남촌으로 옮겨 고종32년(1895)까지 약 243년간 존치하였습니다. 수영에서는 둘레 1,193보, 높이 13척의 수영성이 쌓여져 이성의 내부만을 수영동이라고 하였다가 점차 확대되었으며, 오늘날의 수영동은 동래부 남촌면의 1동 15리 중에서 동부리, 서부리, 북문외리, 남문외리의 4리가 이에 해당됩니다. 1895년 구군제가 폐지되고 일제가 조선을 합병한 후 이곳을 수영이라 하였는데 1942년 10월 1일 시구확장에 따라 부산부로 편입되어 이곳에 수영출장소가 설치되었습니다.

  • 수영동의 마을이름들
    • 남수리
      • 수영동을 일제시대에 남수리라고도 했습니다.

망미동

고려시대 충신 정서가 고향인 동래에서(현재 망미2동 고려제강 뒷편산) 귀향살이를 하면서 초하루와 보름날에 임금을 향하여 망배를 들었다는 데서 망미동이란 명칭이 생겨났다는 설이 있으며, 또 하나는 배산과 망산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써, 연산동쪽의 배산 기슭에는 성황당이 있어 그 신주는 배미산 산신이라고 전해지는 이야기로 현재의 주민들도 이 산을 배미산 또는 잘미산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현재의 수영동과 망미동 사이의 산을 망산이라 하는데, 망산의 '망' 자와 배미산의 '미' 자가 합쳐서 된 명칭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망미동은 부족국가시대에 거칠산국의 중심지였으며, 국군통합 병원자리를 중심으로 하여 성곽이 있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동래부 남촌이다가 한말에는 동래부 남상면으로 개칭되었으며, 일제하에 동래군 남면 서부리, 북문외리로 개칭되었습니다.

  • 망미동의 마을이름들
    • 구 락 리
      • 망미2동의 수영강변에 옛날에는 흰 모래가 많았는데, 이곳에 흰 갈매기가 많이 날아와 놀고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설도 있고, 이곳이 뻘이었는데 황새들이 많이 날아와서 그렇다는 설도 있습니다.
    • 오옹건니
      • 정서가 정과정 모래톱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건너편 해운대쪽의 들녘에 오이를 가꾸며 지냈는데 오이 할아버지가 건너 다니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설도 있고, 이곳에서 용두갑까지 정서를 나룻배로 건네준 어부가 있었는데 성씨가 오씨였으며, 오옹이 나룻배로 건네 주었다고 하여 이 나룻터를 오옹건니라 불렀다는 설도 있습니다. 지금의 망미2동 4 - 7번지 일원으로 85년도에 정과정비 건립추진 위원회에서 화강암으로 된 시비를 세워 놓았습니다.

광안동

광안동은 일명 범바위라 불리어 왔으며, 그 유래는 현재의 성분도 치과병원이 있는 옆쪽에 범의 형상을 닮은 큰 바위가 있었는데 해가 저물 무렵 이곳을 지나가던 나그네가 이 바위를 보고 범이 나타난 줄 알고 혼비백산 기절을 하여 온 마을이 큰 소동이 벌어진 데서 전래된 듯합니다. 예전에는 광안리해수욕장의 백사장을 멸치잡이하는 막장이 있어서 남장(南場)이라 했는데, 그 남장이 넓은 광(廣), 모래언덕 안(岸)이 되어 광안(廣岸)이라 썼습니다. 그 광안의 안(岸) 을 덕명인 편안할 안(安)으로 고쳐서 이즈음은 광안(廣安)이라 쓰고 있습니다. 1910년 행정구역을 제정할 때 동래군 남면 광안리라 개칭하였으며 광안리는 조선시대 후기에는 남문외리에 해당되는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의 수영로 아래쪽 부근에 30여 호의 마을이 있었으며,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농사를 짓는 한편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광안공설해수욕장이 개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해수욕장 앞바다에는 도메막, 뒷막, 새막, 굴뚝치막 등 5개의 어장이 형성되어 이 어장에서 광안리 어민이 주가 되고 인근 남천, 민락, 수영, 망미, 연산동, 심지어 동래지역 사람까지 모여들어 고기잡이에 종사했습니다. 8·15해방 전에는 수영로 위쪽을 윗깍단(윗뜸), 아래쪽을 아래깍단(아래뜸)이라 불렀는데, 위쪽에는 80여 호의 농촌마을이 산재해 있었으며, 농사만으로도 생계가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 광안동의 마을이름들
    • 범바위
      • 광안4동의 성분도병원 근처에 범모양의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 장대골
      • 장대란 적의 침략을 살피는 군사시설의 하나였고, 조선시대 수영중학교 뒷편에 장대가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매년 10월 1일 좌수영 무사가 무사들의 무예를 시험했던 곳이라 합니다.
    • 어구정
      • 현 광안동 842번지에 어구정이란 정자가 있었습니다. 이곳은 수영무사들의 궁술훈련장이었습니다.
    • 칠산포영
      • 지금의 광안리해수욕장 부근에 임진왜란 직후에 수군이 주둔했던 칠산포영이 있었는데, 무관 종4품의 만호를 수장으로 하는 만호영을 홍해에서 옮겨와서 광안리 일대의 바다를 방위토록 했습니다.

민락동

민락동이란 지명 유래는 백산북쪽의 보리전 마을과 백산남쪽의 널구지 마을, 2개의 큰 자연부락이 약300년 전부터 있었으며, 일제시대에 보리전 마을을 평민동이라 하였고, 두 마을 백성들이 모여 즐겁게 사는 동네라하여 민락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두 마을을 합하여 민락동이라 하여 동래군 남면에 편입시켰습니다. 널구지란 현재의 민락초등학교 동편의 수영2호교가 있는 높은 부분을 말하며, 수영강쪽으로 땅이 뻗어있어 모두 편편하고 넓다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으며, 보리전은 두 가지 설로 첫째는 조선시대 좌수영 산하의 포이포진이 있었던 곳으로 그 음이 변전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수영에는 "보리 양식 지고 매맞으러 간다"는 속담이 전해지고 있었는데, 조선시대 좌수영 산하 7진의 주민들이 범법을 저질렀을 때 범법자가 곤장을 맞으러 좌수영 산하 7진의 주민들이 범법을 저질렀을 때 범법자가 곤장을 맞으로 좌수영 관아로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범법자 대신 대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매를 맞기 위해 열흘 내지 보름치의 보리 양식을 가지고 이곳에 와서 매맞는 차례를 기다렸다가 매를 일찍 맞고 나면 보리 양식이 남기 때문에 이것을 수영 사람들에게 팔고 가려고 보리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보리전'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설이 있습니다.

  • 민락동의 마을 이름들
    • 널구지
      • 지금의 민락초등학교 동편 수영2호교 부근을 널구지라 했습니다. 널구지는 판곶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이 주변이 편편하게 넓은 터전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 보리전
      • 지금의 수영교부근을 보리전이라 하며, 이곳이 조선시대 좌수영 산하의 포이진이 있었던 곳입니다. 하나는 포이진이 음이 변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시대 좌수영 산하에 범법자가 곤장을 맞기 위하여 보리양식을 매고 와서 기다리는 곳이 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 광기전
      • 각종 그릇 종류와 목물류를 팔고 사는 시장이 형성되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 포이포
      • 원래 울산의 장기에 있었던 수군영이었으나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동래군 남촌(수영)으로 옮겨 왔는데, 지금의 수영교 근방이라 보고 있습니다.
    • 칠포리
      • 원래 경북 홍해에 있던 수군영이었으나 임진왜란후 부산포로 옮겨 왔다가 다시 동래군 남촌면(수영)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지금의 민락동 진조말산 서남쪽 부근으로 보고 있습니다.
    • 감포리
      • 원래 경북 홍해에 있던 수군영이었으나 임진왜란후 부산포로 옮겨 왔다가 다시 동래군 남촌면(수영)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지금의 민락동 진조말산 동쪽 부근으로 보고 있습니다.
    • 진조암
      • 민락동 남단 진조말산에 있는 자연석 바위입니다. 조선시대에 그 해의 첫 어로작업이 시작되던 날, 수영 수사가 이곳에 나와 의자처럼 생긴 바위에 앉아 어부와 수군들을 격려하였다고 하며, 이곳은 수영강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곳으로서 고기가 많이 잡힌 곳으로 유명하며 무형문화재 62호인 좌수영어방놀이가 이루어진 현장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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